2024년 나들이

7월 '문화가 있는 날' 경복궁 나들이

행복 찾기 2024. 8. 10. 10:54

국립고궁박물관을 뒤로 하고 경복궁을 찾는다.

 

오늘은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로

무료로 고궁나들이를 즐길수 있다.

 

경복궁은 강북도심에 위치하여 외국인 방문여행시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사적 제117호이며,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춘 궁궐로 북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건설한 것으로 〈시경〉의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따 이름을 지었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궁궐 내부는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과 근정문과 향오문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 공간은 정사를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에는 제반시설이 자리한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겪어 이에 대한 복구가 거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원래 건물을 해체하는 등 본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일부가 복구되었으며, 이후 경복궁 복원 사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다양한 국보·보물급 건축물과 석조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무더운날씨에 그늘 없는 궁궐을 다니기에는

쉽지 않은 나들이라서 가볍게 주요 전각들만 둘러보았다. ^^

 

 

일시 : 2024.07.31 수 맑음

코스 : 경복궁 한바퀴

 

 

 

 

국립고궁박물관을 둘러보고 경복궁으로 향한다. 

 

 

 

 

경복궁은 외국인 선호도 1위의 방문여행지이다.

 

 

 

 

곳곳에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 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때마침 광화문에는 수무장 교대식이 열렸다.

 

 

 

 

‘서울 왕궁수문장교대의식’은 영국 버킹엄궁 근위병 교대식과 비견되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한국 전통문화 상품으로 서울시가 1996년부터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덕수궁 대한문에서 왕궁수문장교대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영국 버킹엄궁, 중국 천안문 광장, 대만 중정기념당 등의 근위병 교대식에서의 절도 있는 의식은 상징적으로 국가의 역사와 긍지를 압축하여 보여 주고. 또한 그 자체가 국가와 역사에 대한 하나의 교육현장이자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수문장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문장청’이라고 한다. 종 6품의 수문장과 참하, 수문군 등으로 편성되어 근무를 하며, 궁궐문 경비와 통행인 감시, 문을 열고 닫는 책임과 궁궐 내외를 순찰하는 순라 업무를 수행하였다.

 

 

 

 

사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란 용어는 경국대전 등 조선시대 자료에는 보이고 있지 않으나, 직품과 직제 형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궁성, 도성문 개폐의식, 궁성 시위의식, 행순의식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 명칭을 ‘왕궁수문장교대의식’이라 칭하여 재현하고 있다.

 

 

 

 

흥례문(興禮門) 으로 들어선다...경복궁의 중문으로 ‘흥례’는 ‘예를 일으킨다’라는 뜻이다. 원래 홍례문의 이름은 ‘홍례문’이었으나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가,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후 2001년에 복원하였다.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위로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영제교는 세종 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때도 큰 훼손 없이 있었다가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보수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흥례문과 같이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하였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발로 밟고 지나다녔는데 이제는 훼손방지시설이 설치되었다.

 

 

 

 

근정문 뒤로 근정전이 보인다.

근정문(勤政門)은 근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 옆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궁궐 정전의 정문 중 유일하게 2층 규모로 지었다. 근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단종, 성종,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근정문은 행각을 포함하여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근정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근정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어좌 및 근정전 내부 전경

 

 

 

 

근정전을 둘러싼 회랑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북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근정전에서는 정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가 왕위에 올랐으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수정전은 근정전과 경회루 사이에 있다.

수정전(修政殿)의 ‘수정’은 ‘정치를 잘 수행하다’라는 뜻으로, 고종 대 편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고종 대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은 건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가 들어섰고, 이후 의정부(議政府)가 내각(內閣)으로 바뀌면서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 수정전 일대에는 세종 대에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었다. 수정전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회루(慶會樓)의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경복궁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다시 만들었다. 성종과 연산군 대에 수리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중건하였다.

 

 

 

 

경회루의 1층은 48개(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 각 24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의 모습으로 만들어 얹은 장식 기와)이 있다. 경회루는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회루 내부관람은 사전 예약자만 가능하다.

 

 

 

 

경회루 2층에 오르면 기둥사이로 보이는 주변풍경이 볼만하다.

 

 

 

 

멀리 인왕산에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의 뒷펀마당...이 전각은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1890(고종 27)에 지은 건물이다. 함화당의 함화 모두가 화합하다라는 뜻이고, 집경당의 집경 계속하여 공경한다라는 뜻으로 두 건물은 별도의 건물이지만 복도로 이어져 있다함화당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집경당은 고종이 신하들과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두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도 철거되지 않은 건물인데 몇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원정(香遠亭) 향원 향이 멀리 간다라는 뜻으로, 원래 이곳에는 세조 대에 세운 취로정이 있었다. 그러다가 1873(고종 10)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향원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2층의 육모지붕의 형태로 지었다. 향원정을 가기 위해 지은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라는 뜻에 취향교(醉香橋)라고 불렀다. 그리고 향원지 서북쪽에는 향원지의 근원이 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샘은 향원지를 시작으로 경회루 연못을 거쳐 경복궁 밖으로 흘러 나갔다. 향원정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취향교는 무지개 모양의 흰색 다리로 조성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는데 향원정 남쪽으로 복원되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향원정 보수공사 때 취향교는 원래의 자리로 복원하였다.

 

 

 

 

자경전 벽담...이곳은 뒷마다의 십장생굴뚝이 유명하다.

자경전(慈慶殿) 자경 어머니의 복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 혜경궁(헌경황후)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지은 자경당의 유래가 된다. 자경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1867(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신정황후 조씨(24대 헌종의 어머니이자 26대 고종의 양어머니, 대한제국 선포 후 황후로 추존됨)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고종 25)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이다자경전 주변으로는 복안당(福安堂, ‘복안’ : 복되고 편안함)과 청연루(淸讌樓, ‘청연’ : 조촐한 연회), 협경당(協慶堂, ‘협경’ : 함께 경사를 누림) 등 부속건물을 따로 두었는데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여기저기서 한복차림의 방문객들이 사진 남기기에 바쁘다.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문을 나서는 여행객

 

 

 

 

함원정에서 다시 근정전으로...

 

 

 

 

 

 

 

 

 

 

긍정전 서측에 인왕산 북측에 북악산이 보인다. 

 

 

 

 

광화문으로 나선다...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광화’는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라는 뜻이다. 광화문은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은 왕이, 좌우의 홍예문은 왕세자와 신하들이 각각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 월대는 조선 시대 월대 가운데 유일하게 기단을 쌓고 난간석을 둘러쌓았으며, 남북 48.7m, 동서 29.7m 규모로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왕의 길인 어도지의 너비는 약 7m이다. 어도 앞부분 끝에는 서수상 2점이 남쪽을 바라보고 배치되었으며, 기존 광화문 옆에 있던 해태(해치)상도 복원된 월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하였다.

 

 

 

 

광화문을 뒤로 하고 덕수궁으로 향한다.

광화문광장에는 물놀이로 아이들이 흥겹게 노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