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

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 - 9편(81번~90번)

행복 찾기 2019. 7. 11. 07:15

드디어 "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을 마무리하고 포스팅을 한다.

6월말에 2박3일의 일정으로 잔여 장소인 21곳의 답사를 마쳤다.

 

빡빡한 일정의 강행군이였지만 그동안 여행하면서 낯설지 않았던 장소들이였기에

지난 날의 추억도 소환하면서 남도 일대를 순례하여 기간내에 미션을 완성한다.  

 

처음 시작할때는 기간내 될수 있을까, 할수 있을까 하는 기대반 걱정반 이였는데 

막상 마무리가 되니 기쁨이 크다.

 

순례를 하며 전시된 기록물들을 돌아보니 한반도의 주변정세는 백여년전의 구한말이나 

해방후 맞이한 예전의 시대 상황들이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지금과 유사하게 펼쳐지고 있다.

 

더군다나 일본의 행태는 과거사 반성 및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도 없이 

몰염치힌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 

 

어서 빨리 통일을 이루어 극일과 더불어 대한의 기세를 높여야 할것 같다. ^^

 

 

81. 송진우선생 기념관(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

82. 정재건선생 유적지(곡성군 입면 약천리 약내마을 377)

83. 백당신태윤기념관(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99-2)

84. 서재필기념공원(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

85.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길 22-45)

86.주재년열사기념관(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작금마을)

87. 황현생가(전남 광야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

88. 권병안선생 생가(순천시 승주읍 봉덕리 249)

89. 매천사(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90. 백산 안희제생가(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81. 송진우선생 기념관(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2019.06.28

 

 

 

 

 

송지우선생은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의 운동복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여 동아일보의 사장을 사임하기도 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념관 옆의 석물들에 대한 안내

 

 

 

 

 

82. 정재건선생 유적지(곡성군 입면 약천리 약내마을 377)...2019.06.28

 

 

 

 

 

정재건선생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순절한 애국지사로 1991년 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택은 사람의 인기척도 드물어 조용하기만 하다.

 

 

 

 

 

83. 백당신태윤기념관(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99-2)...2019.06.28

 

 

 

 

 

이곳은 전에 대한독립영웅전을 위해 방문한 곳으로 두번째 방문이다.

곡성 단군전은 신태윤이 1916년 학정리 삼인동에 세웠던 것을 1931년 봉황대로 옮겨 중건한 것으로, 

매년 10월 3일 개천절과 3월 15일 어천절에 단군 성조의 제사를 모시며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애국동지를 규합하고 단합을 약속하였던 곳으로 경내에는 3·1운동 기념비와 설립자 백당 기념관이 있다.

 

 

 

 

 

곡성 단군전이 있으며 기념관은 출입문 옆에 위치한다. 

 

 

 

 

 

 

 

 

 

 

 

기념관 뒤편에 위치한 단군상

 

 

 

 

 

84. 서재필기념공원(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2019.06.28

 

 

 

 

 

기념공원에는 재현된 독립문 및 기념관, 사당이 있다.

 

 

 

 

 

기념관 내부...독립문형식의 출입구이다.

 

 

 

 

 

초상 및 개화문

 

 

 

 

 

 

 

 

 

 

 

막상 서재필선생을 포스팅 하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업적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게 부정적이다.

그의 업적은 행적에 비하여 과대 포장되고 대중들에게 이미지조작 되었다고 한다.

 

 

 

 

 

과거의 흔적이 어떤 경로로 과대 포장이 되었는지 역사의 흐름이 아쉽기만 하다.

기념관에서 가졌던 존경심이 역사에 대한 배신감으로 스며든다. 

 

 

 

 

 

서재필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남겨보면...(이이화의 인문 한국사 참조)

첫째, 그는 우리나라가 식민지상황을 겪을때에 미국에서 편안히 살았다.

둘째, 친미파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하며 민족정신을 깡그리 부정했다.

셋째, 자신의 이익을 너무 밝혀서 그 당시 어려운 대한제국의을 상대로 온갖 이익을 챙겨갔다.

이런 그가 부각된 이유는 미군정이나 친미파의 이미지조작이며, 언론의 지나친 떠버림이다.

 

 

 

 

 

똑같은 크기로 재현된 독립문

 

 

 

 

 

기념공원 안내도

 

 

 

 

 

우리는 바른 역사를 위해 진실의 토대 위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 할것이다.

 

 

 

 

 

85.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길 22-45)...2019.06.28

 

 

 

 

 

기념관 건너편 가옥이 은거 했던 곳이다.

 

 

 

 

 

김구선생이 인천감옥을 탈옥후 피신할만한 곳을 찾아 삼남지방을 유랑했으며

당시 보성을 지나던 중 송곡면 쇠실마을에 45일 동안 머물렀다. 

 

 

 

 

 

기념관은 2006년 세워진 백범 김구 은거기념관은 기능보강 공사와 전시시설을 개편을 마치고 전시회

와 함께 이번에 재개관하였으며,''김구 선생이 걸어온 독립운동의 길과 전남 보성 쇠실마을과의 인연''을 

주제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문, 김구와 전라도의 인연을 소개하는 영상, 

보성출신의 독립운동가 53인 소개물 등이 전시되었다.

 

 

 

 

 

 

 

 

 

 

 

 

 

 

 

 

 

 

 

 

 

 

 

 

 

 

 

 

 

 

 

 

 

 

 

마당에 있는 은거추모비

김구선생은 집을 떠날때 그간 보살펴 준 은덕에 감사하며 이 집의 종친 김광언에게 한국 역사책을 남겼는데, 

책의 속표지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한시(이별난) 한수와 김두호라는 서명이 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벗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하자 김구 선생은 김기옥(김광언의 손자)에게 안부를 묻고 한번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난 지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백범 김구선생은 김두호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이 쇠실 마을을 다시 찾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쇠실 마을을 다시 찾은 소감을 “감격에 넘치었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86.주재년열사기념관(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작금마을)...2019.06.28

 

 

 

 

주재년은 1940년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최연소 항일 지사로

1929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작금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돌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5세 때 조선 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다니면서 마을 담장 밑 큰 돌 4개에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朝鮮日本別國),

일본은 패망한다(日本鹿島 敗亡),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의 빛(朝鮮之光)’이라고 새겼다.

 

 

 

 

 

이로 인해 경찰에 검거되었고,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 받고 4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도중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1944년 순국하였다.

 

 

 

 

 

2006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대상자로 확정되어

2006년 8월 15일 제61주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유족이 훈장을 받았다.

 

 

 

 

 

전라남도는 주재년의 항일 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진 만큼 ‘소년지사 주재년 현창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생가 터 복원과 기념비 건립, 추모 행사 등 다양한 선양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때마침 방문한 날에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고 있어서 기념관 내부는 보지 못하였다.  

 

 

 

 

 

87. 황현생가(전남 광야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2019.06.29

 

 

 

 

 

광양 봉강에서 태어난 매천 황현선생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국치(國恥)에 통분해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분연히 자결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광양시에서는 매천 황현선생의 생가를 2001~2002년에 복원하였다.

 

 

 

 


매천 황현은 조선말기 절의를 지킨 우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나 34세에 생원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구례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고 개화 운동에 일찍 눈을 떠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 등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껴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겼다. 그의 나이 56세인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88. 권병안선생 생가(순천시 승주읍 봉덕리 249)...2019.06.29

 

 

 

 


권병안선생은 의병으로 전남 순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권병안은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전남 순천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의병활동 중 1909년 6월 20일 전남 순천군 쌍암면 서변리에서 일병에게 피체되었으며,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생가는 잠겨 있고 추모비를 둘러본다.

 

 

 

 


89. 매천사(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2019.06.29

 

 

 

 


조선 후기 황현()을 배향한 곳인데, 1955년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터로, 순절할때까지 살앗던 곳으로 현재는 사랑채가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광양시 봉강면 서석촌이지만, 이사한 후 순절할때까지 살았던 곳이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로 지금의 매천사가 위치한 곳이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들어가는 문이 잠겨있다.

매천사는 구례에서 성삼재방향으로 오르는 도로옆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옆으로 돌아서 전경을 바라본다.

매천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이다.

 

 

 

 


90. 백산 안희제생가(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2019.06.29

 

 

 

 


백산 안희제선생은 일제강점기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이자 실업가이다.

 

 

 

 


생가는 1993년 1월 8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안채와 사랑채·부속사 등 2동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농가주택이다.

 

 

 

 


안채는 정면 6칸 팔작지붕집으로 앞뒤 툇간이 발달하여 길어진 측면의 길이와 조화를 이룬다.

실내는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