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

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 - 5편(41번~50번)

행복 찾기 2019. 3. 26. 06:35

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중 5편으로 41번부터 시작한다.

전국에 산재한 현충시설을 돌아보다 보니 전시된 사진 및 기념물을 여러곳에서 보게된다.

덕분에 전에 보았던 선열들의 성함이나 얼굴을 보게 되면 반갑기도 하다.

 

전시된 기록들을 보면서 몰랐던 우리의 역사도 돌아보고...

아쉬웠던 역사에 대하여는 안타깝기도 하다. 

 

과거의 아픔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  

 

 

41. 최용신선생기념관(안산시 상록수공원내)

42.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 및 기념관(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

43. 김한종의사 생가지 및 기념관(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장신신흥길 283-12[신흥리 70] )

44. 수당 이남규선생 고택(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45. 숭열사 및 이상설 생가(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46. 손병희선생 유허지(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

47.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48.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49. 남자현지사생가지(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50.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41. 최용신선생기념관(안산시 상록수공원내)...2019.03.11 

 

 

 

 

 

기념관은 소설 상록수의 실제 여주인공 애국계몽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선생을

기리고자 안산시가 2007년 건립한 공립박물관(경기도 08-박-08호)이며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13-1-23)이다.

 

 

 

 

 

최용신기념관은 최용신 선생이 샘골마을사람들과 함께 세운 ‘샘골강습소’가 있던 곳에 건립되었으며

지상의 외형은 샘골강습소를 복원한 형태로 하고 내부는 체험전시실과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관 주요 전시 유물은 최용신 선생의 건국훈장, 최용신선생의 유언장, 상록수 초판본(1936년) 등이 있으며,

관련 사진 및 생존제자의 영상에세이, 영화 상록수가 담긴 영상물을 관람할수 있다. 

 

 

 

 

 

심훈의 문학 기념비

 

 

 

 

 

 

 

 

 

 

 

월요일 방문이라 기념관이 휴관이다.

 

 

 

 

 

 

 

 

 

 

 

그 당시의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기념관전경

 

 

 

 

 

42.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 및 기념관(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2019.03.17

 

 

 

 


태안보훈공원 옆에 생가 및 기념관이 있다.

 

 

 

 

 

이종일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지사이다.

 

 

 

 


기념관 내부...입장하면 첫번째로 만나는 다양한 태극기

 

 

 

 

 

다양한 태극문양중에 어떻게 지금의 태극기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살펴보니...행정안전부 국가상징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인식 때 게양된 국기의 형태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2004년 발굴된 자료인 미국 해군부 항해국이 제작한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실려 있는 이른바 ‘Ensign’기가 조인식 때 사용된 태극기(太極旗)의 원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1882년 박영효(朴泳孝)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사화기략(使和記略)」에 의하면 그해 9월 박영효(朴泳孝)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를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으며,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은 다음 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으나,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42년 6월 29일 국기 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국기 통일 양식」(國旗統一樣式)을 제정·공포하였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 「국기 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국기 제작법 고시」를 확정·발표하였다.

이후, 국기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들을 제정·시행하여 오다가, 2007년 1월 「대한민국 국기법」을 제정하였고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2007. 7월)과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국무총리훈령, 2009. 9월)도 제정함에 따라 국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태안의 독립운동가

 

 

 

 


이종일선생의 유적지

 

 

 

 


 찬찬히 전시물을 살펴보는 옆지기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이종일선생은 상단 좌측에서 두번째이다.

 

 

 

 


사당 및 동상

 

 

 

 


 

 

 

 

 


 

 

 

 

 


생가는 동향집이며, 6칸 겹집으로 ㄴ자집형 평면의 초가집이다. 북쪽과 동쪽에 각각 2칸을 달았다.

 

 

 


 

태안보훈공원 전경

 

 

 

 

 

43. 김한종의사 생가지 및 기념관(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장신신흥길 283-12[신흥리 70] )...2019.03.17

 

 

 

 


김한종 의사 생가지는 일제강점기 예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한종()[1883~1921]이

태어난 곳이며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기념관 전경

 

 

 

 


활짝 핀 매화꽃

 

 

 

 

 

생가지는 1996년 11월 30일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안채는 쓰러지고 사랑채는 형태만 남아 있었다.

김한종의 손자가 1990년 고향으로 돌아와 생가를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2000년 다시 건물을 지었다.

초가집으로 앞뒤 2동으로 앞에서 보이는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2칸이며, 뒷편의 안채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주련()에는 김한종 의사가 남긴 유언이 적혀 있다.

 

 

 

 


 모현문...김한종의사 영정이 있는 광복사 정문이다

 

 

 

 


기념관을 둘러본다.

 

 

 

 


건축가인 김경식 관장은 독립운동가 김한종의 정신과 기개를 느끼게 하기 위해 직접 감옥의 이미지를

담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김한종의 강직함을 현대로 끌어 오기 위한 요소를 배치하는 등 당시의 시대상황과

국민들의 심정을 느끼고 되새길 수 있도록 하였다.

 

 

 

 


 

 

 

 

 


김한종의사기념관은 광복관, 정려관, 일우관, 모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관이 너무 컴컴하고

공사가 마무리 된건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워서 관람이 쉽지 않으며,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이런 모진 환경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을 그때를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이다. 

 

 

 

 


전시실이 너무 어둡고 인적이 없다 보니 둘러보지 못하고 입구만 바라본다.

정려문...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를 게시한 문을 지칭한다.

김한종 가문의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와 두 효자의 효행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광복문...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의 활동상 및 동지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 있는 일우문...김한종의 친필 서한 및 판결문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모현관에는 김한종 의사

순국기념비 및 유적지를 건립한 예산모현사업회의 활동상 및 학생들의 체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2층 계단에서 김한종의사를 돌아보며 기념관을 나선다.

 

 

 

 

 

44. 수당 이남규선생 고택(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2019.03.17

 

 

 

 

 

 

 

 

 

 


이남규 선생 고택은 구한말 의사이자 항일 운동가인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가이다.

본 고택은 1637년에 최초 건립되었고, 1846년도에 다시 지어졌다

 

 

 

 


 

 

 

 

 


사랑채...이 집은 일반적인 사대부 집과는 특이한 점이 많다. 대개 사랑 앞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데

이 집은 사랑채가 안채보다 뒤편에 있고, 들어가는 방향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안채는 사랑채 뒤쪽 툇마루를

이용하거나 별도의 출입문을 달아 주변 시선을 차단하고 있는데, 이 가옥은 안채의 협문으로 사랑채 전용 문을

달아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도록 당당하게 표현했다.

 

 

 

 


수당고택의 안채...월방이 아름다운 수당고택 안채의 대문

월방은 건넌방으로 안방에서 대청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방을 말한다.

명품고택 인증표시가 있으며, 숙박시설로도 활용이 되는 듯 하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안채의 날개채는 안방과 건넌방이 대칭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앞에는 멋진 나무가 조경되어 있는데 나무마다 명패가 달려있다. 수당선생고택은 사랑 담장이

없어 특이한데, 내외담은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내외담은 한옥만이 갖는 특이한 구조다.

 

 

 

 


늦은 시간이라 기념관은 둘러보지 못하고 고택을 돌아보았다.

 

 

 

 

 

45. 숭열사 및 이상설 생가(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2019.04.06

 

 

 

 


1907년 이상설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고 시도하였다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자 러시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사망하였다

 

 

 

 


숭모비

 

 

 

 


이곳 사당은 1972년 진천읍에 교성리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로 확장 이건하였다.

당시 이건할 때 주변에는 초가집인 그의 생가도 함께 복원되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형적인 사당의 형식을 취하였다.

 

 

 

 


사당 안에 있는 영정

 

 

 

 


이상설(, 1870. 12. 7(음)~1917. 3. 2) 선생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말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거치고 1907년 내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이후 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46. 손병희선생 유허지(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2019.04.06

 

 

 

 


1962년에는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충북문화재보존협회가 그의 생가 근처에 유허비를 건립하였고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생가 및 사당

 

 

 

 


 

 

 

 

 


생가는 정면 4칸·측면 1칸 반의 건평 1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보수한 것이며,

1978년에는 막돌담장에 한식기와를 얹어 다시 정비하였다.

 

 

 

 


 

 

 

 

 


의암영당

 

 

 

 


 

 

 

 

 


 

 

 

 

 


기념관을 둘러본다.

 

 

 

 


손병희는 동학()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의 도중()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으며 1897년에는 천도교() 3세 교주()가 되었다.

 

 

 

 


1919년 기독교, 불교 대표들과 함께 3·1운동을 영도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옛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에서 요양하다가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봉황각()에 있다.

 

 

 

 


독립선언서

 

 

 

 


다양한 독립운동 자료 및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 53회 생신 기념사진...왼쪽 두번째 분이 사위인 소파 방정환선생

 

 

 

 


33인의 존영

 

 

 

 


기념관을 나서며 발걸음을 옮긴다.

 

 

 

 


47.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2019.04.06

 

 

 

 


1993년 11월 5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

혹은 단재영각()으로 불린다.

 

 

 

 


신채호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였던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묘소에서 바라다 본 사당 및 기념관

 

 

 

 


저서인 조선상고사를 보고 있는 단재 신채호

 

 

 


 

기념관을 들어서니 눈에 띄는 선언문(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하며,

이 선언에 의하여 의열단은 항일 투쟁노선을 정당화하고 지표가 되는 이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의 ‘조선독립의서’와 함께 식민지시대 2대 명문장으로 평가된다.

 

 

 

 


 그 당시 독립운동열사 분들은 왕래가 있었는듯 하다.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1924년에 집필된 [조선상고사]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주체성의 문제를 한국사 체계나 사관() 정립()에 있어

기본전체로 삼고,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아()와 비아()의 투쟁() 사관이라는 격렬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그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일정하게 대응되는 것으로서,

 

 

 

 


조선사를 서술할 때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설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한국사의 범위와

그 서술방법을 역사론적으로 밝혀놓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조선민족 중심의 역사인식은 [낭객의 신년만필]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에 대한 경고로서 오늘날에도 교훈적이다.

 

 

 

 


"우리 조선은(…)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기념관을 나서며 한민족의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온몸을 바치신 선생의 업적을 다시 돌아본다.  

 

 

 

 


48.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2019.04.07

 

 

 

 


 

개항기 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화전등전투를 벌였던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터에 조성되었으며,

의병활동 기록 및 의병들의 참뜻과 정신문화를 전하는 공원이다.

전국 최초로 의병 유공 선열로 서훈된 전원의 위패를 한곳에 모시고 있다.)

 

 

 

 

 


 

 

 

 

 


항일의병기념공원은 모두 전통 한옥인 충의사, 효제충신재(), 인의예지재(),

항일의병기념관, 창의루()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을 들어서며...항일의병의 효시인 임진왜란(1592년~1596년)의 역사성과 한말 갑오경장(1895년)으로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의병사의 역사성과 청송지역의 의병활동 사실을 전시한 기념관이다.

 

 

 

 


전국적인 항일의병의 활동상과 함께 청송 지역의 의병 활동상을 알리면서 의병정신을 재조명하였다.

 

 

 

 


의병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구국 민병이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의병 활동

 

 

 

 


 

 

 

 

 


 

 

 

 

 


기념관을 나서니 오전에 다녀온 주왕산국립공원이 멀리 보인다.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는 매년 6월 1일 의병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50.남자현지사생가지(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2019.04.07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1872~193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이

3년 여의 조성 기간을 거쳐 1999년 11월 30일에 복원한 생가()이다.

 

 

 

 


1872년 12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19세 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사는 김영주()에게 시집을 간 후, 남편이 의병으로 활동하다 전사한 후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만세운동 후 중국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에 적을 두고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33년 3월 1일 일본의 만주정부 건국일에 일본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폭살하려던 거사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모진 옥사를 치렀다. 남자현은 1933년 8월 22일 중국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숨을 거뒀으며,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칸 규모의 외문을 지나면 본채와 문간채가 있고,

본채 뒤편 경사진 산 쪽으로 정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추모각이 있다.

 

 

 

 


50.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2019.04.07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권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보존·전시하고,

그 정신을 교육·계승하는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2014년 1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승격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전시실, 연수교육시설, 자료실과 수장고가 있다. 전시 시설을 통한 연수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최대의 장점을 갖춘 것이 기념관의 특징이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의 독립운동은 유교문화의 학문적·정신적 맥락에서 전개되었고,

대다수 지도자들은 퇴계학맥을 잇는 유교적 지식인이었다. 이는 혁신적 변화를 통해 나라를 잃은

힘든 시대에 책임있는 행동을 선도했다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유학의

긍정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늦은 시간 방문이라서 전시실 등 내부는 보지 못하고 기념관을 한바퀴 둘러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