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6편으로 51번부터 60번까지이다.
주왕산을 산행하면서 들린곳이라 경북 안동 및 영주부근의 현충시설이 많다.
현충시설을 방문할때 시간이 이르거나 늦을 경우 전시물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쉬웠으나
안동지역은 독립열사의 고택이 현충시설로 지정된 곳이 많아서 그나마 볼거리를 느낄수 있다.
이제 현충시설 베스트 100중에 절반을 넘겼다.
기간내에 100군데를 다 볼수 있을런지 기대해 본다. ^^
51. 임청각(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53(법흥동))
52. 이육사생가(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 672-9)
53. 향산고택(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297-6)
54. 온계종택(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20)
55. 이육사문학관(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백운로 525])
56. 자양영당(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
57.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대전 중구 어남동 233)
58. 정인승박사 기념관 및 유허비(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계북면))
59. 문태서의병장 생가지(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27·1028 일대)
60. 노응규의병장 생가(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79-1)
51. 임청각(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53(법흥동))...2019.04.07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선생의 생가로 1911년 1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13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 이준형에게 임청각 역시 처분하라고 했으나, 문중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어주면서 이를 말렸다.
임청각은 조선 중기의 정자형 별당건축으로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19년(중종 14)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건립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살림집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집이다.
임청각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중앙선 부설을 핑계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마당 한가운데 철길을 냈다. 해방 이후에는 1963년 1월 21일
'안동 임청각정침군자정'의 명칭으로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9월 '안동 임청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18년 9월부터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2025년까지 중앙선 철로가 놓이기 전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선생의 가족 중에 독립운동을 한 공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만 모두 11명이다.
해가 진 늦은 시간인데도 집을 둘러 볼수 있도록 대문은 열려있다.
가옥에는 사람이 사는듯하다.
고즈넉한 고택에 봄꽃이 활짝 피어 색감을 더한다.
고택을 분단한 철길이 없어지고 임청각이 빨리 제모습을 찾기를 바래본다. ^^
52. 이육사생가(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 672-9)...2019.04.07
해가 진 늦은 밤이라서 대문이 잠겼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원래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육사의 본디 이름은 원록(源祿)이다. 육사라는 이름은 그가 대구형무소에 수용되었을 때 수인 번호가
64(또는 264)여서, 그 차음(借音)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53. 향산고택(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297-6)...2019.04.08
향산고택은 애국지사 향산 이만도 선생의 옛집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 280호이다.
아침 이른시간에 내부에서 인기척이 나길래 밖에서만 돌아본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놓고 24일간 단식하다가 순국하였다.
1949년 순국한 장소인 청구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1962년에는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1986년 3월 1일에는 한집안 3대의 독립유공을 기려 3대(三代)독립운동가문으로 지정받았다.
집의 형태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자형 사랑채와, 정면 5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ㄷ자형의 안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54. 온계종택(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20)...2019.04.08
온계종택은 온계선생 12대 종손 이의화의 아우인 이인화의병장 생가로 의병진화에 나선 일제의 의해
방화로 망실되어 2011년 5월에 복원되었다.
대문이 잠겨 있어서 외부만 둘러본다.
현재는 숙박시설 등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55. 이육사문학관(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백운로 525])...2019.04.08
2001년 100명의 이육사기념관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고, 2002년 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준공하였다.
다양하고 발전적인 문화예술 기획과 운영을 위해 2008년 11월 지역 문인과 시민 및 관련 인사들로 구성된
(사)이육사추모사업회에 운영과 관리를 같은 해 12월부터 위탁했다.
방문한 날이 월용일 휴관일이라서 내부구경을 못했다.
이육사는 생애를 통틀어 36편의 시밖에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다음해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 신석초를 비롯한 문우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어 [육사시집]이 <서울출판사>에서 나온다.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의 낙동강 곁에 육사의 시비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생전의 행적과
시 ‘광야(曠野)’가 새겨져 있다. ‘광야’는 시인이 죽은 뒤 아우가 수습한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56. 자양영당(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2019.04.08
구한말 의병의 창의지 자양영당은 조선시대 말, 1906년(고종 43) 유림에서 창건한 서당이다.
처음에는 주자와 송시열, 이화서, 유중교의 영정을 봉안했다. 뒤에 의병장인 유인석, 이직신의 영정을
추가로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암 유인석장군의 “8도에 고함“ 창의지이기도 하지만
구한말 모든 의병창의 기폭제였던 명실공이 의병의 성지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유중교가 1889년(고종 26)에 세운 창주정사가 있던 자리이다.
건물구조는 목조기와집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앞에는 뒷마루가 있는 팔작집이다.
자양영당은 습재 이소응과 화서학파 유림들에 의해 건립 되었고, 그 해 주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다. 후에 의암 유인석과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후손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지내고 있다.
담장안에 있는 자양서사...조선말기의 유학자인 유중교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89년(고종 26)에 세운 서당으로 현판이 좌우로 달려있다.
의병전시관
기념탑은 제천의병이 한말 의병항쟁의 상징적 존재였음을 뜻한다. 전체 구조는 주탑과 주변구조물
그리고 3개의 인물조각으로 구성하였다. 중앙의 주탑은 의병이념을 상징하고 좌우에는
그 당시의 민중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조각으로 의병정신과 의병항쟁을 표현하였다.
"자양영당"은 구한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한 목숨 바쳐서 풍운을 막아보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넋이 흐르는 곳으로서 굽이굽이 예순 굽이길의 박달재를 넘어,
제천시의 관문에 나지막이 자리잡은 곳이다.
57.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대전 중구 어남동 233)...2019.04.27
유허비와 안내판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1992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ㄱ자형의 안채와 헛간을 복원하고,
1996년에 생가지 앞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신채호선생은 8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할아버지를 따라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26세에 박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능했던 모양이다.
박대기꽃이 색감을 뽐내며 활짝 피었다.
선생은 1929년 5월 9일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여순 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다 1936년 향년 57세로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생가 전체풍경
58. 정인승박사 기념관 및 유허비(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계북면))...2019.04.27
정인승선생은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건재(健齋)이다. 1897년 계북면 양악에서 출생하여,
1925부터 1935년까지 고창고보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고유 문화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한글 연구를 택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인 한글 연구에 힘을 쏟았다.
졸업 후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한글지]의 발행을 주관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우리 말 체계화를 위한 핵심적인 연구들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10월부터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말 [ 큰사전 ]편찬 작업을 완수하고
평생을 한글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1997년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전시관 내부
59. 문태서의병장 생가지(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27·1028 일대)...2019.04.27
사당으로 이어지는 길 양옆으로 연혁이 기록된 초석들이 놓여있다.
의병대장 문태서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것으로
매년 4월 문태서장군 생가복원지에서 개최하고 있다.
사당에서 바라본 풍경
사당 전경
항전중에 세운 의병장의 비석
60. 노응규의병장 생가(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79-1)...2019.04.27
노응규 의병장은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게 점령된
진주성을 빼앗고, 이후 영남과 호남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펼쳤다
그 후 고종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아 1906년 6월 최익현의 전북 태인 의병에 가담한 후
충북 황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 정찰 부대와 일제 시설물을 공격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7년 경성감옥소에서 순국하였다.
생가는 2008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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