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

꼭 가 봐야 할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 - 8편(71번~80번)

행복 찾기 2019. 6. 19. 07:08

이제 베스트 독립운동 현충시설 100중에서 8편인 70번이다.

어느덧 순례길도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마무리를 할때가 되었다.

 

미션 시작 할때는 기간내에 마무리 할수 있을까 했는데 대한민국 산천을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한곳씩 찾아가다 보니 200일 동안에 100곳을 방문하는 미션 완성이란 목표도 생겼다.

 

어떤 곳은 예전에 독립영웅을 찾기 위해 방문한 곳으로 다시 보게 되니 반갑기도 하였다.   

요즘은 마무리를 위한 전국일주를 앞두고 남아 있는 장소들에 대한 동선을 짜기 바쁘다. ^^

 

 

71. 대한의사 일괴 이명균선생 유적지(김천시 구성면 상좌리)

72.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구미시 왕산로 28-33[임은동 228-1])

73. 국립신암선열공원(대구광역시 동구 신암5동)

74. 조양회관(대구 동구 효동로2길 94 (효목동))

75. 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670)

76. 교남 YMCA회관(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24-0)

77. 김창숙선생 생가(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

78. 백세각(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

79. 백정기의사 기념관(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

80. 송진우선생 고택(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

 

 

 

71. 대한의사 일괴 이명균선생 유적지(김천시 구성면 상좌리)...2019.06.01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이에 격분해 침략의 원흉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20년 3월 경상북도 김천에서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이응수(李應洙) 등과 함께 해외에 있는

항일운동단체와 연락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독립후원의용단(大韓獨立後援義勇團)을 조직했다.

신태식과 김찬규는 각각 경상북도단장·경상남도단장을 맡고 그는 재무총장의 책임을 맡아 5차례에 걸쳐

10여 만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으로 송금하는 한편, 1922년청송·안동·영일·영천·군위·영덕·창녕 등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요구서와 사형선고서를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1월 동료단원 30여 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이듬해 3월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여독으로 죽었다.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72.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구미시 왕산로 28-33[임은동 228-1])...2019.06.01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은 개항기 대표적인 의병이자 독립운동가인 허위의 우국충정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동시에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개관하였다.

 

 

 

 

 


허위(1855(철종 6)∼1908)선생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1896년 2월(음력)에 의병을 일으켜서 1908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유동()이라는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51세로 순국하였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1층에는 추모의 장, 훈장실, 전시실, 기획 전시실, 영상 추모관,

회의실, 관장실, 사무실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기념관 옆에는 사당이 있다.

 

 

 

 


 

 

 

 

 


73. 국립신암선열공원(대구광역시 동구 신암5동)...2019.06.01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공원으로 국내 유일의 애국지사묘지공원이다.

본래 애국지사의 묘소는 대명동 시립공원에 있었으나 1955년 대구대학교가 들어서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후 묘지성역화 사업에 의하여 1987년 3월 1일 선열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단충각() 등의 시설이 있으며 대구 지역 출신 애국지사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단충각...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단충각에는 선열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는 물론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과 학생운동·신간회 활동 등에 관한 기록도 보관하고 있다.

 

 

 

 


74. 조양회관(대구 동구 효동로2길 94 (효목동))...2019.06.01

 

 

 

 


대구 독립운동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중국·만주 등지에서 항일민족운동을 펼치던

서상일(:1887∼1962)이 대구에서 대구구락부()라는 친목단체를 결성하여 지역 청년들을

교육하는 한편 민족의식의 구심이 될 회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회관은 대구구락부를 모체로 하여

1922년 대구 달성공원() 앞 대지 500여 평에 붉은 벽돌로 지상 2층의 서구식 건물로 세워졌다.

 '아침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건물 이름을 조양회관이라 하였다.

 

 

 

 


서상일선생 동상

 

 

 

 


이 건물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구부립도서관(), 일본보급부대, 한민당사무실,

유격대 병영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50년 원화여자중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서상일의 뜻을 이어

다시 조양회관이라 명명하고 교무실·도서실·양호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뒤 원화여자중고등학교가 옮겨감에 따라 198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망우공원()으로 이전하여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지금은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두산정계비...백두산 천지에서 본 정계비가 생각난다.

 

 

 

 


 

 

 

 

 

 

75. 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670)...2019.06.01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으로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단연()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기념관은 이른시간에 방문하여 관람을 못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17년도에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원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배우고자 1907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 극복과 도심지내 녹지공간 확보 및 시민의 안락한 휴식공간 제공을 위하여

명칭 또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정하여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중구 동인동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내 위치한 서상돈선생 및 김광제선생 흉상

 


 

 

 

76. 교남 YMCA회관(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24-0)...2019.06.02

 

 

 

 


일제 강점기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회합의 공간이자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운동 등 기독교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건물이다.

 

 

 

 

 

1914년에 건립하였으며 대구광역시 등록문화재 제570호이다.

이른시간의 방문이라서 내부관람을 못하였다.

 

 

 

 

 

77. 김창숙선생 생가(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2019.06.02    

 

 

 

 

 

생가는 선생이 22세 되던 해에 화재를 당하여 1901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전 건물을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고종 16년(1879)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이다.

 

 

 

 

김창숙선생 생가와 인접한 청천서당

 

 

 

 


청천서당은 현충시설이 아니며, 경북유형문화재 제261호이다.

 

 

 

 

 

청천서원은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된 것을 심산() 김창숙(:1879~1962)의

부친 김호림()이 청천서당으로 고쳐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김창숙이 세운 성명학교()의 건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78. 백세각(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2019.06.02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송희규의 후손 송만수가 소유 관리하는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맞배지붕‘ㅁ’자형 집이다. 송희규는 1546년(명종 1) 당시 세도가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다. 5년만에 풀려난 뒤 1551년에 백세각을 기공하여 

이듬해 준공하였는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성주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송준필()을 비롯한 문인들이 독립청원장서 3천 장을 이곳에서 복사하여 성주 장날에 배포하였다. 

여기서 국내 유림의 거두들이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독립 진정서인 파리장서를 기장하였다.

 

 

 

 

 

79. 백정기의사 기념관(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2019.06.28

 

 

 

 

 

사단법인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가 2004년 6월 5일, 항일 독립운동가인 백정기 의사의 

고귀한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세운 기념관이다.

 

 

 

 

 

백정기의사는 3의사의 한분이며 아나키스트로서 친일모리베배 척결에 앞장섰다.

 

 

 

 

 

총 면적 20,849㎡의 기념관 부지에는 의열사를 비롯해 구파기념관,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백정기 의사 동상(), 어록() 비문, 순국() 비문, 추모() 비문 등이 있다.

 

 

 

 

 

 

 

 

 

 

 

1997년 의열사()를 짓기 시작하여, 2004년 6월 5일 준공된 의열사 안에 백정기 의사의 영정을 봉안함으로써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2007년 4월에 정읍 9경 선정위원회에서 내장산, 덕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이평() 전봉준 장군 고택() 등과 함께 정읍 9경에 선정되었다.

 

 

 

 

 

 

 

 

 

 

 

활약상이 잘 전시된 기념관

 

 

 

 

 

백의사는 옥고 중 1934년 6월 5일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향년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적지() 일본에 묻혔다가 조국광복 후 1년 만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게 조국에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천묘의식()을 치룬 뒤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기념관 앞 마당의 태극기 이야기

 

 

 

 

 

80. 송진우선생 고택(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2019.06.28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언론인이었던 고하 송진우( 1889~1945)가 성장했던 가옥으로 

조선 말기 또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워졌다.2005년 12월 27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겸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의 구조가 남아 있으나 변형되었고 지붕은 후대에 다시 올린 것이다.

 

 

 

 

 

한말의 의병장인 성재 기삼연( 1851~1908)이 189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광주에서 활약하다 1902년 체포되었고, 서울의 평리원에 수감되었다가 감옥에서 탈출하였는데 그때 이 가옥에 

은거하며 송진우에게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송진우의 고택이자, 

한말 호남지역 의병사의 중심인물이었던 기삼연의 은신처였다는 점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