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들이

설명절 4대 고궁(종묘,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나들이

행복 찾기 2024. 2. 18. 18:15

설명절 고궁(종묘,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나들이를 나선다.

하루는 홀로, 또 하루는 옆지기와 함께한다.

 

연휴기간 동안 무료개방을 하는데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

세종대왕 유적은 12일까지 설 명절기간 특별운영에 들어가며

창덕궁 후원을 제외하면 모두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문화재로 가득하며,

외국인에게 인기 1위인 곳이다.

 

가볍게 부지런히 걸어서 종묘와 4대 고궁을 돌면서

설연휴에 값진 볼거리를 즐긴다. ^^

 

 

일시 : 2024.02.10(토), 12(월) 맑음

코스 : 4대 고궁(종묘,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먼저 종묘를 들머리로 하여 입구인 외대문을 지나서 빠르게 정전에 들어선다. 현재 정전은 보수중으로 가림막이 처져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렀다.

 

 

 

 

정전의 우측에 위치한 영녕전.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五廟制)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別廟)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이후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世室, 대대로 정전에 신주를 모심)’ 조천(祧遷,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김)’의 예로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祔廟禮,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때 정전에 처음 신주가 모셔지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하여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되어 현재의 정전 19,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종묘에서 창덕궁으로 이동하여 인정전 앞마당 도착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인정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인정전은 창덕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1418(태종 18)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광해군 2)에 재건, 1803(순조 3)에 소실된 것을 다음 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인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외행각 일부는 1991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마루는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창덕궁과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의 ‘양화’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뜻으로,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 뒤편 언덕에서 본 풍경

 

 

 

 

경복궁 가는 길에 만난 열린송현녹지광장

인왕산(좌)과 북악산(우)이 보인다.

 

 

 

 

제일 인기가 많은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북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근정전에서는 정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가 왕위에 올랐으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근정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광무 6)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중화전 내부...일월오악도 및 용상이 보인다.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은 석조전서관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덕수궁을 나와서 고종의길을 걷다가 만난 러시아공사관

보수를 마치고 멋지게 모습을 들어냈다.

 

 

 

 

고종의 길이 있는 정동근린공원...아관파천(1896) 당시 고종의 피난길로 2016년 9월 복원이 시작돼, 2018년 10월 정식 개방됐다.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로,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의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한 것이다.

설연휴에 홀로 서울의 고궁을 둘러보며 즐겨보았다. ^^ 

 

 

 

 

설연휴 마지막 날 옆지기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나선다.

출발은 서소문역사공원이다.

 

 

 

 

서울로를 걷는다. 

 

 

 

 

남산이 잡힐듯이 앞에 보인다.

 

 

 

 

창경궁 홍화문...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홍화문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또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화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명정문은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명정문은 명정전과 함께 처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다. 행각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하였다. 명정문 및 행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이는 창경궁이 정치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명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조정에는 품계석이 있는데, 조회나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은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명정전 내부...용상 및 일월오악도

 

 

 

 

함인정(涵仁亭)의 ‘함인’은 ‘인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곳이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정자의 형태로 지었다. 함인정은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공연 등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인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걸려있어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에 운치를 더해준다.

 

 

 

 

창덕궁을거쳐서 경복궁으로 향하다가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경복궁에 도착하니 입장시간에 걸려서 광화문으로 나온다.

광화문 너머로 북악산이 우뚝하다.

 

 

 

 

모처럼 서울나들이에 환한 옆지기

올 설연휴는 이렇게 서울나들이로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