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나들이

2022년 10월 스페인 및 포루트갈 7박9일...바로셀로나 시내관광

행복 찾기 2022. 11. 1. 07:03

스페인 및 포루트갈 여행 첫날은 바로셀로나 관광으로 오전에는 몬주익언덕 및

번화가인 람브라스거리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쿠엘공원 및

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를 돌아보았다. 

 

바로셀로나는 카탈루냐 지방주의 중심도시로 스페인에서 두번째로 크며 가장 큰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200만명으로 1992년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으며, 가우디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름의 유래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그 바르카라고 한다.

 

바로셀로나는 유럽에서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한해 해외여행객이 오천만명 방문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코로나영향으로 우리나라 2021년 외래관광객수는 100만명 정도이다.

 

오전에 다녔던 바로셀로나 시내관광인 몬주익언덕 및 번화가인 람브라스거리를 돌아본다.

 

 

일시 : 2022.10.12 수

코스 : 몬주익언덕 및 번화가인 람브라스거리

 

 

 

숙소를 출발하여 몬주익언덕으로 향한다...이하 현지시간 08:54 

 

 

 

 

대한민국보다 위도가 높지만 야자수도 보이고 지중해성 기후라서 온난하다.

 

 

 

 

야자수와 함께 눈길을 끈 나무가 보이는데 무가 연상되는 형태이다.

 

 

 

 

스페인광장을 지난다...보이는 건물은 예전에 투우장이였는데 지금은 쇼핑몰이다.

다른사람의 여행기를 보면 쇼핑몰옥상에서 바라보는 광장뷰가 굉장히 볼만한 것 같다. 

 

 

 

우리는 몬주익 언덕 밑에 위치한 국립카탈루냐미술관에서 바로셀로나 조망을 볼 예정이다.

광장에서 몬주익으로 가는 대로 주변에는 공공시설이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방직공장이였다고 하는 건축물이다. 

 

 

 

 

카탈루냐미술관 도착...입구에 서니 바로셀로나가 전제척으로 조망된다...09:31

 

 

 

 

 

 

 

 

기념품 등 잡동사니를 파는 상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우측으로 성가족성당이 보인다. 

 

 

 

 

 

 

 

 

 

날씨도 맑고 쾌적하다. ^^

 

 

 

 

성당을 당겨본다.

 

 

 

 

 

 

 

 

 

 

 

 

 

4개의 기둥 앞에 보이는 분수가 몬주익 매직분수로 유명하다.

 

 

 

 

 

 

 

 

 

 

 

 

 

 

 

 

 

 

 

매직분수에서 이곳까지는 많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층빌딩은 안 보이고 성장이 멈춘 도시처럼 조용하다. 

 

 

 

 

 

 

 

 

 

 

 

 

 

 

좌측이 성가족성당 우측이 현대식 건축물인 아그바타워이다.

 

 

 

 

 

 

 

 

 

 

 

 

 

 

국립카탈루냐미술관 전경

 

 

 

 

바로셀로나 조망을 뒤로 하고 번화가인 람블라스거리로 이동한다.

 

 

 

 

미술관 뒷편은 올림픽경기장 및 스타디움이 위치하고 있다.

 

 

 

 

 

 

 

 

 

해안도로를 지나다 보니 크루즈 등 커다란 배들이 보인다.

유럽사람들은 지중해를 이용한 크루즈여행이 발달해 있다.

 

 

 

 

해양박물관 옆 교차로에서 시내관광을 시작한다.

무처럼 생긴 이 나무의 이름은 남미가 원산지인 "술취한나무"라고 한다.

 

 

 

 

해양박물관 앞은 항구이다.

 

 

 

 

술취한나무가 가득한 녹지 

 

 

 

 

해양박물관은 성벽을 따라서 건물이 지어졌다.

 

 

 

 

건너편의 중세건물은 세무서라고 한다.

 

 

 

 

해양박물관을 따라서 람블라스거리로 향한다.

 

 

 

 

 

 

 

 

 

박물관 안에는 콜롬버스사 항해한 배의 모양을 드대로 전시중이라고 한다.

 

 

 

 

멀리 콜롬버스기념탑이 보인다.

마침  이날은 10월12일은 신대륙 발견 기념 국경일로 전통시장등이 문을 닫았다.

 

 

 

 

콜롬버스기념탑

 

 

 

 

해양박물관입구

 

 

 

 

관공서를 지나서 람블라스거리로 접어든다.

 

 

 

 

람블라스거리...가이드는 평상시 붐비는 곳인데 다른날보다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고 한다.

 

 

 

 

 

 

 

 

 

람블라스거리는 카탈루냐광장에서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해안까지 이어진 보행자 전용도로이다.

 

 

 

 

레이알광장

 

 

 

 

레이알광장에 아직도 남아있는 가우디가 설계한 가로등

 

 

 

 

가로등을 가리키는 옆지기

 

 

 

 

 

 

 

 

 

잠시 자유시간을 가진다.

 

 

 

 

보께리아시장은 국경일이라서 문을 닫았다.

 

 

 

 

자유시간도 20분 정도로 짧고 멀리 가기도 어려워서 거리주변의 골목만 잠시 돌아본다.

 

 

 

 

보께리아시장 옆

 

 

 

 

스페인사람들은 식당안보다 밖에서 담소하며 먹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아쉬웠던 것은 나중에 알고보니 쿠엘저택이 근방에 있었는데 가 보지를 못한 것이다.;;

 

 

 

 

약속장소인 콜롬버스 동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오늘이 10월 12일로 콜롬버스데이를 맞이하여 기념탑에서 행사가 열렸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이 아메리카 대륙,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 서인도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을 발견한 것은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경이다. 산타마리아 등 세 척의 범선을 끌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을 떠난 지 33일만의 일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발에 '우연히 채였다'고 하는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원래 그는 보석과 향신료를 찾아 동양의 어딘가로 가고자 했던 것이지, 미개인이 사는 신대륙을 찾아 나섰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지구 어디쯤에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발견이 세계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몰랐다.

 

 

 

 

사실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가 아니다. 우선은 그보다 앞서 살았던 원주민들이 먼저 발견했고, 콜럼버스 이전에 일본이나 중국의 배들이 태평양을 표류하다 아메리카 서해안 어딘가에 닿았을 가능성도 있다. 1010년에는 한 무리의 노르만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오늘날의 뉴펀들랜드로 건너와 2, 3년을 머문 적도 있다.

 

 

 

 

어찌 되었든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임자 없는 빈 땅이 아니었다. 원주민들이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임자가 있는 물건을 두고 이를 내가 '발견'했다든지, 심지어 '내가 발견했으니까 내 것'이라고 우긴다면 이는 전형적인 강자의 횡포에 다름 아니다. 콜럼버스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논리다. 이미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원주인을 몰아내고 그 땅을 빼앗은 정복자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분명 세계사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노르만인의 발견은 발견으로 끝났지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다시 발견한 후에는 유럽인들이 대거 몰려와 식민지를 만들고 오늘날의 아메리카를 건설했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시점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세 말기의 혼란을 틈타 지방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여러 군주들이 넘치는 군사력을 해외로 돌릴 필요성이 생겼다. 해외 식민지는 야심만만하고 위험한 군인들에게 힘의 분출구를 제공함으로써 국내적 정치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보화는 왕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다. 더 결정적으로는 곧이어 닥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의 여파로 유럽에 수많은 종교난민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신대륙은 이들에게 이상적인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유럽의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도 일회적 사건으로 지나가버렸을지 모른다.

 

 

 

 

콜럼버스의 항해와 신대륙 발견은 흔히 모험과 용기와 개척 정신의 상징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확실히 그는 비범한 용기의 소유자였음이 틀림없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고, 둥글기 때문에 어느 곳을 가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길을 택해도 될 것이라는 기발한 착상에 도달한 사람은 더욱 없었다. 다만 콜럼버스가 몰랐던 것은 지구가 과연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한 곳은 인도였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길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다니던 동쪽 길보다 열 배나 더 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쉽게 길을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모험길에 나서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시 이슬람의 위협이 심각했던 상황에서 중국과 인도의 왕들 가운데 기독교에 동조할 사람들이 있을지 찾아보고자 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유럽의 패자를 꿈꾸는 이사벨라 여왕의 야심, 군인으로서의 정복욕, 그리고 무엇보다 돈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향신료는 음식과 약품으로 두루 쓰인 대단히 귀중한 물품이었는데, 주로 중동 지방을 통해 동양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왔다. 문제는 그 무역 통로의 한가운데에 오스만튀르크가 버티고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피해 아프리카 대륙을 멀리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알려져 있었지만 너무 멀고 위험했다.

 

 

 

 

콜럼버스는 '서인도'를 발견함으로써 이런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첫 번째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그는 두 번이나 더 자기가 발견한 땅으로 건너가 그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돈과 명예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했다. 결국은 같이 목숨을 걸었던 동료들과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이사벨라 여왕, 모두한테 버림받고 1506년에 가난 속에 쓸쓸하게 사망했다.

 

 

 

 

해양박물관 매표소 입구...무료로 이용하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다.

 

 

 

 

 

 

 

 

 

해양박물관 입구

 

 

 

 

콜롬버스기념탑을 뒤로 하고 식당으로 향하며 오전 관광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