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나들이

창덕궁과 후원 및 창경궁

행복 찾기 2014. 9. 16. 23:44

3년전 기록입니다.

 

서울에는 조선 500년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그와 관련한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중 궁궐이 대표적이다.

 

아마 서울에 있는 5대궁궐의 명칭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본다.

그 명칭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이다.

 

고궁중에서 방문을 못 해본 창덕궁을 찾았다.

당연히 후원도 예약을 하고 해설사를 통하여 이모저모 안내를 받으며 궁궐을 감상했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던 곳인데 방문을 하니 묵은 때가 씻겨지는 기분이다.

 

후원 관람후 창경궁으로 향한다.

창경궁은 근대사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곳으로 어릴적에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이라 하여 어린이 날이면 찾던 기억이 있다.  

창경궁은 일제강점기때 왕궁을 욕보일 속셈으로 동물원 및 식물원을 만들고 왕궁의 격을 낮추었는데 

해방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복원 공사를 하였다.

 

오늘 글을 올리려 사진을 다시 보니 그날의 기억이 새롭다.

언제 시간을 내서 다시 방문을 해야 겠다.

정부에서 조만간에 관람료도 올릴 계획이라는데...  

 

일시 : 2011.12.17 토

코스 : 창덕궁 - 후원 - 창경궁

 

 

창덕궁 돈화문 입장후...

 

궁이란 한 마디로왕이 일하고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궁’, ‘궁궐, ‘궁전’이라는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각각의 단어의 의미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궐’은 궁을 둘러싼 담, 문, 누각을 의미합니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이나 동십자각, 혹은 궁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이 ‘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궁전의 ‘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임금이나 그에 준하는 최고의 사람만이 거할 수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궁궐의 건물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에만 ‘전’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 있기 때문에, 경복궁에서 임금이 자는 건물을 강녕전이라 하고 왕후가 자는 곳을 교태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회화나무 군락

창덕궁 회화나무는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람로 양 옆에 나란히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8그루로 나무높이는 15.0~16.0m, 가슴높이 줄기직경은 90~178㎝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회화나무는 궁궐 입구에 특별한 사유를 가지고 심어 가꾸어 왔는데, 창덕궁 돈화문 주변은 궁궐의 삼조(三朝) 중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으로 궁궐 입구 주변에는 예로부터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주례(周禮)」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궁궐이에요.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어요. 이궁이란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지은 궁궐을 말해요. 조선의 왕들 중에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한 왕이 많았어요. 많은 왕들이 머물며 나라를 다스리면서 창덕궁은 자연스럽게 조선 왕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평탄한 곳에 질서 정연하게 건물이 들어선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로 유명합니다. 다른 궁궐들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지어졌다면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게 배치되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지요.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독특한 궁궐 건축과 정원 문화를 대표하는 궁궐이에요. 처음 지어진 건축물들은 전쟁과 화재로 사라졌지만 이후 세워진 건축물들은 조선 시대 궁궐 건축의 변천사를 잘 보여 주고 있어요. 그리고 숲과 나무, 연못, 정자, 화단 등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후원은 창덕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궁궐 및 왕의 역사를 말해주듯이 고목들도 용트림이네요.

 

1392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어요. 그러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지었지요. 태조가 경복궁에 머물며 나랏일을 돌보는 동안 후계자 정하는 일을 두고 왕자들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어요.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요. 이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아들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자신과 반대편에 선 형제인 방석과 방번, 조선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정도전 같은 신하들을 무참히 살해했어요. 이 일이 바로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방원은 형 방과를 2대 왕 정종으로 임금 자리에 앉혔어요.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음 해에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옮겼어요.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의 현장인 한양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정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요.

이방원은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은 아버지가 수도로 삼았던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도록 했고, 그렇게 지어진 것이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은 왕위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에서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세계유산 기념비(1997.12.6일 등록)

 

 

 

 

 

창덕궁은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궁궐에서 왕과 신하들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을 외전, 왕과 왕족들이 살았던 개인적인 공간을 내전이라고 해요. 외전은 돈화문에서 시작되지요. 돈화문은 지금 남아 있는 궁궐 출입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문이에요.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라는 돌다리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와요. 진선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이 보이지요.

인정문 앞마당...후원 입장 전에 이곳저곳 창경궁을 관람합니다.

 

 

 

인정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왕의 즉위식이 열렸답니다. 물론 대부분의 왕들은 정전인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영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답니다. 인정문의 앞마당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인정문 앞마당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도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하여 건축했기 때문이랍니다.

 

인정문 안쪽에는 2층 월대 위에 인정전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어요.

 

 

 

 

희정당 뒤편에는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공간인 대조전이 있습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해요. 매우 중요한 장소였지요.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 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대조전에는 처음에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어요.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는 잠자는 곳이 달랐답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어떤 건물보다도 수난이 많았던 건물입니다. 수차례나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어전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대조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을 상징하는 건물인 정전입니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공식 행사가 열렸던 장소이지요. 인정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내는 하나로 트여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소박한 옥좌, 일월오봉병(병풍), 아름다운 문양의 천장은 조선 왕조의 위용과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정전은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의 역사를 말해주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뒤 임진왜란과 화재로 세 번이나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인정전은 1804년에 지어진 네 번째 건축물이지요.

 

 

 

 

일월도(日月圖)·일월오봉산도(日月五峰山圖)·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고도 한다. 비교적 큰 규모로 궁궐 어좌 뒤,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혼전(魂殿) 등에도 비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항간에서도 일종의 장식화로 민화의 범주에서 그려지기도 하였다. 화면의 대부분을 점하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폭포·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포치시켜 좌우균형을 갖춘 매우 도식적인 그림이다.

임금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발생이나 기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명·청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 소수 남아 있는 작품은 한국과는 묘사와 채색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한 용상

 

 

 

드디어 후원 입장

낙선재와 성정각 사이로 이어진 완만한 언덕길을 넘으면 창덕궁 후원을 대표하는 부용지 구역이 나와요. 언덕 아래의 연못과 단아한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습니다. 원래 부용지 구역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사방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고 해요. 지금도 담장이 약간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사방으로 담장을 쌓아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부용지 건너편 나지막한 언덕에는 2층짜리 누각 건물인 주합루가 있어요. 정조 때 지어진 주합루는 2층을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고 해요. 1층은 수만 권의 책이 보관된 도서관 같은 곳으로 규장각이라 했고, 2층은 우주의 모든 이치가 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곳이란 의미로 주합루라 불렀지요. 주합루는 학자들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장소였어요. 정조는 과거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 이곳에 주합루를 세워 학문에 매진하도록 했답니다. 주합루 입구에는 어수문이란 문이 있는데 이곳으로는 왕만 통과할 수 있었고, 신하들은 옆의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어요. 작은 문은 높이가 낮아 통과하려면 고개를 숙여야 해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낮게 만들었다고 해요. 부용지 동쪽에 있는 영화당이라는 건물 앞마당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특별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부용지의 연못은 면적이 약 1000㎡로 후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에요. 연못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둥근 섬이 있어요. 부용지는 동양의 음양 사상을 잘 담아 지은 곳이에요. 음양 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네모난 연못은 땅을 의미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답니다.

 

 

 

부용정은 공사중...

 

 

어수문

 

 

 

 

불로문(不老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부용지 북쪽에는 숙종 때 지어진 애련지가 있습니다. 숙종은 〈애련정기〉라는 글을 통해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이곳의 이름을 ‘애련지’라고 붙였다고 해요. 애련지로 들어가려면 늙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로문을 통과해야 해요. 조금은 단출한 느낌을 주는 정자 애련정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조선 시대 선비의 단아함을 닮은 것 같답니다.

 

 

 

 

애련지 남쪽으로는 효명 세자가 서재로 사용했던 의두합과 창덕궁에서 가장 작은 건물 운경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연경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조 때 지어진 연경당은 조선 시대 양반집을 본떠 지은 건물이에요. 훗날 순조와 왕비는 연경당에 머물며 손님을 맞았다고 해요. 사랑채와 안채, 서재인 선향재, 농수정 등으로 이루어진 연경당은 99칸까지만 지을 수 있었던 일반 양반집과는 달리 120여 칸으로 구성됨.

 

 

 

 

 

 

 

 

애련지에서 오솔길을 따라 이동하면 존덕정 구역으로 창덕궁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곳이며,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아름다운 연못과 존덕정, 폄우사, 승재정 등 여러 석조 건축물을 볼 수 있다. 2중 지붕에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존덕정은 천장에 다른 정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청룡과 황룡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어 존덕정이 곧 왕의 휴식 공간이라는 걸 말해 준다.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취한정,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등 여러 개의 아담한 정자가 있습니다. 인상적인 곳은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청의정으로, 창덕궁 건축물 중 유일하게 초가지붕으로 꾸며졌답니다. 청의정 앞에는 작은 논이 있어요. 왕이 농사일을 직접 체험해 보고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왕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지요. 그리고 벼를 파종하고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볏짚으로 지붕을 덮었어요. 나머지 정자들은 왕이 쉬거나 독서를 하는 장소였어요.

 

 

 

 

초가지붕의 청의정

 

 

 

 

 

 

후원을 돌아서 나오면 다시 진선문을 만나며 이후 창경궁으로 향한다.

 

진선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이 있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 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 때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창경궁(昌慶宮)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1483년(성종 14)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憙王后)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1790년(정조 14)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퇴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翼閣)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 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건립하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하여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창경궁은 해방 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이용되다가 1981년 정부에 의해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옥천교[ 玉泉橋 ]

궁궐의 정전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정전의 정문과 궁궐 대문 사이를 흐르게 한 금천을 건너게 된다. 옥천교는 바로 금천 위에 놓은 다리로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의 대문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성종 14년(1483)에 건립된 것이다. 이 돌다리는 두 개의 아치를 틀고서 그 위에 장대석으로 귀틀을 짜고, 장대석과 판석을 끼워넣어 바닥을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돌난간을 세웠다. 또 옥천교의 양끝에는 석수를 돌로 깎아 세웠으니 이런 양식은 창덕궁의 금천교나 경복궁의 영제교와 같은 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