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를 맞아서 고궁관람이 무료로
개방되어 옆지기와 함께 고궁나들이를 나선다.
덕수궁을 시작으로 청계천을 거쳐서
종묘,창경궁 및 창덕궁을 돌아보았다.
9월임에도 무더위가 한창이라 땀깨나
흘리면서 서울 강북도심을 다녔다.
고궁나들이는 항상 가면 느끼는 것이
마음이 여유롭고 차분해진다.
추석 연휴 끝무렵 한가롭게 돌아본 고궁나들이다.
일시 : 2024.09.18. 수 맑음
코스 : 덕수궁-청계천-창경궁-창덕궁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대한문을 들어서고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본다...함녕전
정관헌...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인데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포치(건물의 입주나 현관에 지붕을 갖춘 곳)가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고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관헌 내부전경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라는 뜻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돈덕전은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다.
2023년 9월 26일 다시 개관한 100년 전 대한제국의 외교 무대를 꿈꾼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은 서양식 2층 건물로 일제에 철거된 지 약 100년 만에 재건된 것이다. 2017년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약 6년 만에 완성한 돈덕전은 복원보다는 재건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대한제국 외교의 중심 공간이었던 역사적 의미를 살리면서도 내부 공간을 전시실과 도서 자료실, 문화·예술 행사 공간으로 꾸며 활용도를 높인 점이 특징이다.
20세기 초 서양의 살롱을 본떠 만든 듯한 2층 아카이브실(자료실)
2층 발코니를 나가본다.
돈덕전을 지나서 석조전을 지나간다.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지난 여름 석조전 앞마당을 붉게 물들였던 배롱나무꽃의 색감이 엷어졌다.
덕수궁을 지나서 청계광장
서울거리예술축제 2024가 한창 진행중이다.
관객들이 제법 있다.
청계천을 따라서 종로3가로 향한다.
이제는 시민들의 휴식장소로 자리잡은 청계천
징검다리를 오락가락...
세운상가 앞마당 세운광장 도착
멀리서 북악산(좌) 및 북한산(중)이 펼쳐졌다.
종묘는 사진을 안 남기고 가볍게 둘러보고 창경궁으로 입장한다.
명전전 앞마당
개방된 영춘원에서 잠시 더위를 피한다.
통명전 앞마당...멀리 N서울타워가 우뚝하다.
창경궁을 거쳐서 창덕궁으로 입장
낙선재일원...조선 24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1847년(헌종 13)에 창경궁 낙선당 터에 낙선재를 지었고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석복’ : 복을 내려줌)과 수강재(壽康齋, ‘수강’ : 오래 살고 건강함)를 지었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라는 뜻으로,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황후 김씨(순조의 왕비)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특히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다음 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마루는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인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외행각 일부는 1991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인정문에서 바라 본 인정전 전경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인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추석연휴 마지막날에 돌아본 서울고궁나들이
고궁은 언제봐도 눈이 즐겁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나들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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