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들이

강화 전등사 및 정족산산행

행복 찾기 2024. 2. 24. 13:20

강화 전등사 및 정족산을 돌아본다.

오전에는 길상산을 오르고 오후에는 정족산을 오른다.

 

온수리성공회성당을 들머리로 하여 정족산성을 돌아보고

전등사를 구경하며 하산한다.

 

이곳도 눈이 쌓여서 나름 볼만한 경치가 펼쳐졌다.

눈이 덮힌 산성과 풍경이 잘 어울린다.

 

산성의 전망대에서는 강화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나름 바다풍경도 선사한다.

 

짧은 거리에 높지 않은 산행이라 시간도 구경하기

적당하게 3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당분간 강화도 미답구간의 산을 계속 오를 예정이다. ^^  

 

 

일시 : 2024.02.23 금 흐림

코스 : 온수리 성공회성당-정족산성(삼랑성)-전등사-온수리 성공회성당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주차를 한다.

 

 

 

 

강화도에는 유명한 성공회성당이 두곳 있다.

 

 

 

 

전등사 남문입구...매표소로 오른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우측 산성을 오른다.

오전에 오른 길상산이 보인다.

 

 

 

 

당겨본다.

 

 

 

 

산성 전망대...달맞이고개인듯하다.

 

 

 

 

동쪽, 북쪽으로 조망이 탁 틔였다.

 

 

 

 

김포방향

 

 

 

 

석모도방향...중앙은 진강산이다.

 

 

 

 

강화평야...고려때 부터 몽고 전쟁으로 강화천도를 한후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바다를 매립하여 농경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해협 건너 문수산(좌)에도 눈이 덮혀서 하얗다.

발아래 온수리에는 출발지점의 성당이 보인다.

 

 

 

 

확실히 서쪽지역이라서 높은 산이 없이  평야가 넓게 펼쳐졌다.

 

 

 

 

우측에 계양산이 보인다.

 

 

 

 

진강산과 덕정산...덕정산은 미답구간이다.

 

 

 

 

조망을 즐기고 북문으로 향한다.

 

 

 

 

하얀 눈이 덮힌 산성너머로 진강산 및 석모도가 보인다.

정족산성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강화 천도기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3세기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겨본다.

 

 

 

 

둘레 약 2.3km인 삼랑성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성벽과 문루를 고쳐 쌓았고, 성내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史庫)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역사적 현장이다.

 

 

 

 

우뚝 솟은 곳이 정족산 정상이다. 해발 220미터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는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2,300미터 정도이다.

 

 

 

 

강화도의 남쪽 지역에 위치한 정족산성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형적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삼국시대 최초 축조되었고 이후 조선후기인 영조대에 들어서 다시 수축되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양헌수 휘하의 조선군의 공격에 크게 패하여 물러나기도 한 곳이다.

 

 

 

 

정상부는 공사중인지 펜스로 막아 놓았다.

 

 

 

 

진강산방향

 

 

 

 

지나온 산성길도 돌아보고...

 

 

 

 

오전에 올랐던 길상산도 바라본다. 

 

 

 

 

정족산성은 삼랑성이라고도 한다.

 

 

 

 

마니산도 당겨본다.

 

 

 

 

길상산

 

 

 

 

좌 길상산 우 마니산

 

 

 

 

서문으로 가는 등로는 진흙밭이라서 북문으로 향한다.

 

 

 

 

산들은 낮지만 바다와 접한 조망이라서 시원하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둔 김포의 문수산도 당겨본다.

 

 

 

 

문수산 너머는 북녁땅이다.

 

 

 

 

북문 도착...전등사로 내려간다.

북문은 암문(暗門)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강화 정족산사고지...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절의 조망이 바다쪽으로 탁 틔였다...

<전등사본말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아도하상이 처음으로 사찰을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등사는 1600여 년을 이어온 한국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전등사로 이름이 바뀐 연유로는 왕비였다가 쫓겨나 고초를 겪었던 정화궁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세자 왕심()이 충렬왕으로 즉위하면서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딸인 원나라공주가 정비로 들어 앉아 장목왕후가 된다. 즉위 전 충렬왕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던 정화궁주는 궁 밖으로 쫓겨난다. 장목왕후는 정화궁주를 쫓아낸 이후에도 계속 모함하고 곤경에 빠뜨려 정화궁주는 시름에 찬 세월을 보내게 된다. 여몽연합군이 일본침공에 실패해 많은 병사들이 수장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화궁주는 옥등()을 진종사에 바치는데 그 때(충렬왕 8년)부터 절 이름을 전등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장목왕후는 39세에 죽었고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다시 재회했다고 전한다.

 

 

 

 

전등사 전경...전등사()에는 입구를 알리는 일주문()이 없고 절을 지키는 사천왕도 없다. 성 안에 절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삼랑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성으로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안에 단단히 숨겨 놓은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남문...처음으로 나가 본다.

 

 

 

 

이성에는 원래 동, 서, 남, 북에 성문이 있었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5년(1739)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라 하였다. 그간에 성곽과 문루가 무너졌던 것을 197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전등사를 나와서 성당으로 가다가 만난 금풍양조장.

 

 

 

 

성공회성당 도착.

 

 

 

 

가볍게 성당을 둘러본다.

 

 

 

 

정족산 너머로 해가 내려간다.

 

 

 

 

가볍게 천년고찰 그리고 산행을 겸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수도권에서 멋진 눈산행을 경험 한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