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강화 나들이를 하면서 보지 못했던 광성보를 처음으로 둘러보았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2011.07.28에 광성보에서 강화 광성보로 명칭변경 되었다.
고려때 몽고 침략으로 강화외성으로 쌓았고 이후 조선 효종때 광성보를 처음으로
설치하여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봄기운이 올라오는 계절에 강화해협을 마주한 광성보의 돈대들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옛 시절의 역사를 느껴본다.
어려웠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강화도의 외성중 볼거리가 다양하여
강화도 나들이시 추천하는 장소이다. ^^
일시 : 2023.03.26
코스 : 강화 광성보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강화 광성보...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먼저 인해루로 들어가며 강화해협을 둘러본다.
강화해협을 건너서 김포가 바라보인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우측 언덕의 쌍충비각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광성보는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쌍충비는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신미신의총...광성보 내에 있는 조선 말기 무명용사들의 무덤으로 쌍충비각 맞은편 아래쪽에 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광성진(廣城津)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陸戰隊)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 장군과 동생 재순,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들로서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한다.
손돌목돈대 및 용두돈대 갈림길
손돌목돈대...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널찍한 내부...바다를 향해 있는 포대 입구가 보인다.
포대에서 바라다 본 손돌목...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손돌목포대에서 용두포대로 가다 보면 중간에 위치한 광성포대
김포의 덕포진과 마찬가지로 지형을 이용한 포대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보(堡)는 일정한 규모를 가진 부대의 단위, 지휘소, 병사의 주둔지, 창고 등을 포함하고 돈대(墩臺)는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이다.
용두돈대
강화해협에 돌출된 지형에 설치된 천연 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와곽 초소겸 포대이다.
돌출된 곳에 위치한 용두돈대
용두돈대 내부
강화해협...중앙에 길상산, 우측에 마니산이 보인다.
돈대마다 광성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다시 광성보 입구로 돌아간다...좌측은 손돌목돈대
광성보 입구인 안해루에 도착
광성돈대 및 안해루 전경
안해루 옆에 위치한 광성돈대를 둘러본다.
널찍한 내부에는 바다를 향한 포대가 있다.
날이 맑아서 가족끼리 나온 상춘객이 많이 보였는데
광성보를 돌아보며 우리의 아픈 역사인 근대시대를 느껴보았다.
강화나들길 2코스에 위치한 광성보를 둘러보고 강화나들이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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