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나들이

서삼릉을 둘러보며...

행복 찾기 2018. 1. 30. 07:38

조선왕릉의 한곳인 서삼릉을 둘러본다.

서삼릉은 어릴적 외가댁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당시 방문해 본적은 없다.

그래도 첫방문은 어릴적 추억이 있는 동네라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았다.

 

이후 생각이 정리하거나 조용히 산책을 하고프면 가끔 찾는 곳이 되었다.

따뜻한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주차장이 부족하더니 방문한 추운 겨울 평일에는 한산하다. 

 

조선왕조의 한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의 능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이 스쳐간다.

 

 

일시 : 2018.01.12 



서삼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릉()과 효릉() 및 예릉()을 합한 능호()이다.


 

 

 

사적 제200호. 서삼릉은 조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지()로 택하여진 곳으로,

한 때는 중종의 정릉()이 이 능역()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인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이 곳에 자리잡아 중종과 인종의 2대의 능지()로 사용되었고, 그 뒤 근처에 왕실묘지가 이루어져

명종과 숙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역대 후궁을 비롯하여 대군()·군()ㆍ공주()·옹주() 등의 많은 분묘()가 조성되었으며, 1864년(고종 1)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능칭을 얻게 되었다.


 

 

 

출입구...고양시민은 50%로 할인이 된다.


 

 

 

희릉...조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정자각 위에 있는 잡상...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 토우()들

이는 소설 ≪서유기 西≫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손오공상을 살펴보면 타원형 챙이 돌려진 모자를 쓰고서 두 다리가 벌어지게 앉았고 두 팔은 내밀어 무릎 위에 얹고 있다.

 

경회루의 잡상을 보기로 살펴보면, ① 손오공, ② 모자 쓴 짐승(), ③ 사자, ④ 해치, ⑤ 짐승(), ⑥ 용(),

⑦ 해치, ⑧ 봉(), ⑨ ⑤와 같은 짐승, ⑩ 해치, ⑪ ⑤와 같은 짐승의 순이다. 같은 짐승이 여러 번 쓰여졌으며,

⑦의 해치는 뒤로 돌아앉아 있기까지 하는 등 교란되고 무질서함을 보여 주고 있다.


 

 

 

예릉...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의 능


 

 

 

 


 

 

 

 


 

 

 

비각안의 표석...비각은 능앞에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이 있는 곳이다.


 

 

 

정자각...제향을 모시는 건물


 

 

 

예릉을 돌아본후에 의령원으로 향한다.


 

 

 

의령원 및 효창원


 

 

 

의령원은 조선 영조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던 의소()의 묘소이다.

의소는 사도세자()의 큰아들로 영조의 손자가 되며 정조의 형이다. 1750년(영조 26)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그 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불과 3세 만에 죽었다.

영조는 세손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예절을 갖추어 묘소를 꾸미고 사당인 의소묘()를 도성 내 영조가

왕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창의궁()에 세워 절기에 따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묘소는 도성 서쪽 안현()의 남쪽 기슭, 현재의 서대문구 북아현동중앙여자고등학교 내에 세워져 의소묘로 불리다가 1871년(고종 8)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949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효창원은 조선 제22대왕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묘이며, 문효세자는 의빈성씨의 소생으로 1784년 8월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어린나이인 5세에로 죽었다. 이에 시호를 문효라 정하고,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효릉은 출입금지구역이라서 의령원 및 효창원을 둘러보고 서삼릉 나들이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