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포를 거쳐서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했다.
오래전부터 오고 싶던 곳인데 이번 여행에 일정을 잡을수 있었다.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일시 : 2017.08.10 목
하회마을 도착...15:04
보이는 곳이 매표소이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던가 걸어서 들어갈수도 있다.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마을주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며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지었습니다.
마을은 관광객이 많았지만 평온하고 정감이 넘친다.
마을투어 시작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로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 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간이자동차가 골목을 누빈다.
옛날집을 좋아하는 옆지기는 직접 집의 분위기를 느껴본다.
강 건너편에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인 부용대가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의 형상들...만송정숲
원지정사 부근에 있는 보호수
대부분의 한옥은 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영국여왕 방문 식수
충효당
유물전시관
행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몰려있다.
방문객이 많은 편인데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어 골목이 한산하다.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화경당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려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다.
예전에는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큰마을이었다.
서애 선생이 선조 9년 (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
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부용대가 마주 보인다.
보호수
하회마을을 나선다.
이제 하회마을 전망대인 부용대로 향한다.
화천서원 도착...부용대까지 10분정도 걸어야 한다.
화천서원 전경
부용대 도착...뒤편은 낭떠러지이다.
부용대를 뒤로 하고 안동 하회마을 나들이를 마친다.
화천서원은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諡號 文敬公 1539-1601년) 선생의 학덕(學德)을
흠모한 유림(儒林)들이, 정조10년(1786년) 9월에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봉안하였고, 그 18년 뒤인 순조 3년
(1803년)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선생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을 종향(從享)했는데, 두 분
모두는 사승 관계에 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춘추로 향사해오다 고종 5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
그 후,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여러 건물을 복원 1996년 서원을 완성하고
복설고유를 올렸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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