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가 이어지는 토요일...산악회 공지로 개미마을 및 부암동 백사실계곡을 찾았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홍제역에서 7번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한다.
2013년 12월 이후 두번째로 찾은 개미마을
어릴적부터 지내던 동네느낌이 있어서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개미마을 벽화는 전에 비해서 크게 변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관리를 안해서 퇴색한 벽화도 있어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다.
개미마을을 둘러보고 인왕산을 거쳐 부암동 백사실계곡으로 향한다.
비가 많이 오는것도 아니고 나름 걸을만 하다 보니 집에 있는 것 보다 나들이를 나온 것이 잘 한것 같다.
일시 : 2015.02.21 토
코스 : 개미마을 - 인왕산 - 백사실계곡 - 구기동
개미마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개미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인왕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한 마을이다. 서울의 몇 남지 않은 달동네 가운데 한 곳이다. 홍제역 2번 출구 앞에서 마을버스 7번을 타고 좁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면 닿는다. 개미마을의 공식 주소는 홍제3동 9-81. 마을 면적은 1만5,000평 정도 된다. 210여 가구 4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개미마을은 6·25 전쟁 이후 만들어졌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임시 거처로 천막을 두르고 살았다. 당시에는 ‘인디언촌’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천막이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마을 같아서였다고도 하고,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인디언촌’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1983년 ‘개미마을’이라는 정식 이름이 생겼다. 주민들이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이 개미를 닮았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었다고 설명한다.
7번 버스 종점에 하차
내려가면서 건물에 있는 벽화들을 찍어본다.
종점부근 벽화 날짜는 2012년인데 새것처럼 빛깔이 좋다.
진사님들이 나름 열심히 풍경을 찍으며 추억을 만든다.
산비탈에 드문드문 집들이 놓여있다.
이곳은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에서 정거장으로 나온 곳이라 하는데 예전의 멋진 벽화가 퇴색됐다.
2013년 12월 모습
2013년 12월 풍경...차량이 있는 곳은 이런 벽화가 있다.
새로운 벽화지도
개미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도
이제 개미마을 뒤로 하고 인왕산을 오른다.
인왕산에서 본 개미마을 전경...주변 아파트와 대조된다.
멀리 북한산이 조망되고 부암동 및 백사실계곡이 아래에 보인다.
백악산에 운무가 자욱하다...서울산성도 보이고...
북한산 족두리봉 및 향로봉이 보인다.
백사실계곡으로...
가재가 사는 1급 청정지역이다.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문화사적(백석동천, 사적 제462호)과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진 우수한 자연생지역으로서 도룡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룡뇽'은 서울특별시자연환경보전조례에 의한 서울시 보호야생동물로서 백사실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가지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서울의 청정 계곡으로 도롱뇽이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깊은 숲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과 걸음을 막아서는 크고 작은 계곡의 정취는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버들치, 도롱뇽 등의 서식지인 만큼 계곡에 발을 담그지는 말고 그저 풍광만 탐할 것을 권한다. 카페 산모퉁이와 군부대를 지나면 계곡 입구가 나온다
백석동천
2005년 3월 25일 사적 제46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6호로 변경되었다. 1800년대 도성 가까이에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지정면적은 50,861㎡이다.
백악산(북악산의 옛이름)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흰 돌이 많은 백악산을 ‘백석산’에 비견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와 연못지 등이 남아 있다.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와 안채의 건물지가 있고 사랑채는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건물지 아래쪽으로 연못지가 남아 있고 연못 한쪽으로 육각정자의 주춧돌과 돌계단이 남아 있다.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이라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는 등 격조높은 별서유적지이다. 종로구가 관리한다.
세검정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 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었고, 부근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의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다.
탕춘대[ 蕩春臺 ]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연산군 11년(1505)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조 27년(1751) 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둥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29년(1753)에 탕춘중성(蕩春中城)을 새로 쌓고, 30년(1754)에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하고 홍상서(洪尙書)를 시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에 있는 바위에 ‘연융대(鍊戎臺)’ 석자를 새겼다. → 연융대바위 [바위]
세검정에서 조금 오르니 탕춘대터가 나온다.
홍지문에서 북한산 향로봉을 잇는 탕춘산성의 명칭 유래가 되는 곳이다.
구기동을 가기위해 육교를 건너면서 돌아 보니 오늘 지나온 길들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인왕산에서 부터 세검정까지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나들이를 마친다.
음식점에서 문재인의원을 만난 옆지기...기념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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