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용흥궁 및 강화산성 일주
강화에 있는 장모님 산소를 다녀오면서 강화 용흥궁 및 강화산성을 일주했다.
강화산성은 북문에서 출발하여 서문-남산- 남문 그리고 동문으로 돌아봤다.
고려때 부터 하면 천년의 세월을 지닌 산성이다.
가끔 강화를 가면서 느끼는 거지만 산성 주변의 풍경 변화가 더디다.
일시 : 2011.3.12
날이 따뜻한지 맹꽁이가 보인다. 색깔이 빛 바랜 나무잎과 똑같아서 찾기가 쉽지않다.
용흥궁...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초가였으나, 1853년(철종 4)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용흥궁 [龍興宮] (두산백과)
북문 가는 길에 있는 보호수
강화산성 북문(진송루)
강화산성 :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다.
서문 : 첨화루(瞻華樓)
남산 오르기 전...서문을 배경으로
남산 남장대
남문 : 안파루(晏波樓)
강화행렬도 : 철종을 모셔가는 그림이다.
동문 : 망한루(望漢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