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나들이 : 백제유물전시관 및 고인쇄박물관
청주나들이를 나선다.
원래는 괴산으로 백두대간 산행을 나섰는데 비가 내려서 계획을 변경한다.
여행을 할때 참조하는 올댓스템프로 나들이 동선을 살펴보니
가는 길목에 "청주 구석구석 모바일 스템프투어" 가 눈에 들어온다.
그 동안 여행을 하면서 청주는 몇번 스치듯 지나가고 제대로 본 기억이
없어서 "청주 구석구석 모바일 스템프투어" 의 코스를 따라 가 본다.
여행을 할때 비가 오면 제일 좋은 방법은 실내여행인데 마침 청주의
스템프투어에는 비를 피할수 있는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다양하게 위치하였다.
예정된 스템프 20곳중 9곳을 찍으며 한나절의 짧은 시간에 청주를 돌아보니 의외로
짜임새 있는 볼만한 기획물도 많고 경관도 좋아서 다시 오고플 정도로 팬이 되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할때는 시간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면서
"청주 구석구석 모바일 스템프투어"를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이다. ^^
비를 피해 먼저 방문했던 백제유물전시관 및 고인쇄박물관을 돌아본다.
일시 : 2023.09.27 목 비
코스 : 백제유물전시관 및 고인쇄박물관
오전에 내리는 비를 피해 먼저 방문한 백제유물전시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2001년 11월 29일 개관하였다.
관람은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 오후 6시 이다.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선사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청주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청주는 선사시대를 지나 고대부터 마한의 문화를 공유하였으며, 4세기에 이르러 백제의 세력으로 들어갔다. 5세기 이후 삼국의 치열한 접전과 교류로 청주만의 고유한 문화가 마련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청주는 서원경으로 자리하였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청주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아왔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선사시데부터 고려시대까지 전시된 유물
이곳에서는 미호천과 맞닿아있는 구릉에 자리한 청주 송절동 유적에서 조사된 고분군을 소개하고 있다. 청주 송절동 유적은 2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목관묘와 목곽묘, 합장묘와 주구토광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무덤 내부에서는 단경호와 심발형토기 외에 철기,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전시장에서는 청주 송절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토기들을 통해 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전부터 생활했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청주 송절동 유적과 청주 신봉동 고분군을 연결해주는 청주 봉명동 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청주 송절동 유적과 인접한 청주 봉명동 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에 이르는 마한과 백제의 주거지, 토광묘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유공호, 파배, 삼각투창대부직구호 등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마형대구와 ‘대길(大吉)’이 새겨진 청동방울도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전시장에서는 청주 봉명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토기들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애기 하다 보면 중국과 일본은 필연적으로 나온다.
세계 역사를 봐도 가까운 나라끼리 사이가 좋은 나라는 극히 드물데 이는 과거에
가깝다 보니 교류도 많았지만 물라적충돌도 많아서 민족적 감정이 서로 상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백제의 세력이 청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청주 신봉동 고분군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관 뒤편에 자리한 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1982년에 처음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2013년까지 7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를 통해 4세기 중·후반부터 5세기에 이르는 백제의 석실묘와 석곽묘, 토광묘 등이 대규모로 조성된 백제의 고분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토기·마구·무기 등 여러 출토품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무기·마구 등 군사 관련 출토품을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들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
다양한 신봉동고분군의 무덤 모형
청주 여러곳에서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을 보면 귀족이나 지배층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한다.
무덤 제작과정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상영관도 있는데 보지는 못했다.
무덤에서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눈에 들어온 용두사지철당간...국보 제 41호이다.
당간(幢竿)은 한국 사찰에 설치되었던 시설물로, 사찰의 입구에 세워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나 불전을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당(幢)이라는 이름의 기를 내거는 기둥이다.
당간은 원통 모양의 철통(鐵筒) 20개를 위아래로 물려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주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 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졌으며, 청주 지역의 호가(豪家)인 김예종(金芮宗)이 사촌형 희일(希一) 등과 함께 철당간을 주조하여 사찰을 꾸몄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유행병인 염질(染疾)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부처께 재앙의 예방과 사후의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하였다. 기문에서 ‘유준풍삼년태세임술삼월이십구일주성(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이라고 하였는데, 준풍은 고려 광종 11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이 철당간이 962년(광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철당간으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과 칠장사 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3개만이 남아 있다.
당간은 절의 경계에 세워 신성한 사찰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일반적으로 10미터 이상의 높이로 제작되며, 초기에는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의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이후에는 철이나 구리, 또는 석조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당간이 움직이거나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지주를 당간지주라 한다.
이 철당간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청주에는 홍수가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자, 이후로는 홍수가 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불렀다 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문화를 전해주면서 가르킨 나라가 왜(일본)이다.
고분군을 살펴보면 높은 곳은 지배층 낮은 곳은 피지배층의 무덤이 분포한다.
상설전시실을 나와서 기획전시실로 갔는데 문을 닫았다.
기획전시실 앞에 설치된 고분의 무덤형태를 돌아본다.
옛날 사람은 신체가 작았던 것 같다...무덤이 작다.
벡제유물전시관을 뒤로 하고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한다.
고인쇄발물관 도착
청주시 관광안내도를 살펴보는데 명소 및 볼거리가 많다.
청주시에서는 2020년 '옥화구곡 관광길'을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자연친화적인
관광지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총길이는 14.8km이다.
도심지내에 많은 볼거리가 산재한다.
안내판을 뒤로 하고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한다.
고인쇄박물관을 대표하는 "직지"가 조형되어 있다.
고인쇄박물관은 1992년 3월 17일 문을 열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발견된 옛 흥덕사지의 흥덕사지관리사무소로 출발하였다. 1993년 7월 2일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고, 1994년 8월 1일 운영권이 충청북도에서 청주시로 이관되었으며, 2000년 6월 증축공사를 거쳐 다시 문을 열었다. 2001년 11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전국 최우수박물관에 선정되었다.
복원한 흥덕사지
1986년 5월 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은 9만 2588m2이다. 이 지역에서는 1985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서원부 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 새겨진 금구(禁口) 조각과 “…황통 10년(皇統十年)… 흥덕사(興德寺)…”라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 뚜껑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 곳이 1377년(고려 우왕 3) 금속활자를 직접 주조하여 경한(景閑)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인쇄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유적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인쇄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44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세계심판》보다도 63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유일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200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박물관을 들어서면 "직지"의 금속활자본이 크게 설치되었다.
상설전시관 첫번째는 직지에 관한 전시이다.
직지는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 제목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 책은 고려 말에 국사를 지냈던 백운이라는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으로 원래 상하 두 권이었는데 현재는 하권만 남아 있고 그것도 첫 장은 없어진 상태이다.
[직지]는 한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라는 사람이 정식으로 구매한
것으로 이것이 몇 단계를 거쳐 나중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직지의 기나긴 여정
흥덕사지의 발견
금속활자 제작과정
우리의 [직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 가운데 해당 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선정된 유일한 예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직지]는 우리나라 책이지만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음에도세계유산으로 인정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이 [직지]를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했을 때 이 책이 한국에 있지 않아 불합격 요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네스코 당국은 이 책은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소재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직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이 책이 한국의 것이며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것을 밝힌 분은 박병선 박사로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있으면서 이 책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혼자 노력으로 이 책이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러는 과정에 활자를 만들다 불을 내기도 하는 등 박사님은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셨다..
디양한 인쇄판
금속활자의 발명이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데 1999년인가 쯤에 미국의 유명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지난 1천 년 동안 있었던 사건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대 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때 1위를 한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었다고 한다.
금속활자 주조법
책은 기록이자 지식이 되고 그것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축적되어 인류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책을 다량으로 민드는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 문명을 귀받침하는 기술이다.
일상을 기록한 인쇄물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향한다.
2층 입구의 쿠텐베르크... 독일의 활판 인쇄 발명자ㆍ창시자
1450년경 금은 세공사(金銀細工師)인 푸스트(Johann Fust)의 출자(出資)를 얻어 인쇄소를 설치하고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行)의 라틴어 성경, 즉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했다.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나은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성서를 인쇄, 이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2층은 동양 및 서양 인쇄술의 비교와 기증자의 전시물 등이 있다.
2층의 기증, 기탁전시를 끝으로 관람을 마친다. ^^